“실력도 실력이지만”.. 자타공인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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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를 묻는 오래된 질문이 있다. 통산 기록으로 줄을 세우면 여러 이름이 경합하지만, 이 질문 앞에서 유독 한 이름이 반복해서 불린다. 최근 야구 커뮤니티에서도 그의 이야기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이유는 성적표 바깥에 있다.

기록 밖에서 완성된 위대함

주인공은 고 최동원이다. 1984년 한국시리즈 4승 신화로 상징되는 전설적인 커리어만으로도 역대 최고 투수 반열에 오르지만, 그가 ‘가장 위대한 선수’로 불리는 결정적 이유는 마운드 밖에 있다.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이다.

프로 출범 초창기, 선수들은 구단 앞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였다. 스타 선수조차 구단 관계자에게 함부로 대해지는 시절이었다.

그 현실을 목격한 최동원은 1988년 선수들의 연대체인 선수회 결성을 주도했다. 노조 같은 조직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분위기라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 자체가 불안하던 시절이었다.

버스 대절부터 경비까지, 전부 사비였다

과정은 혼자만의 싸움에 가까웠다. 최동원은 전국의 선수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설득했고, 대전의 한 호텔에서 열린 창립식은 프로그램 준비부터 버스 대절, 호텔 대관 비용까지 모두 자신의 사비로 치렀다. 구단 측의 방해에 대비해 경비 인력까지 직접 동원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배경에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다. 부친 최운식 씨는 아들에게 “너만 잘 먹고 잘 살면 프로 선수가 아니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했다. 당대 최고 스타가 굳이 험한 길을 자처한 이유였다.

대가는 유니폼이었다

구단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결성을 주도한 선수들은 잇따라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됐고, 최동원 역시 롯데를 떠나야 했다. 선수들 사이에서는 사실상의 보복성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리그 최고 투수가 선수 권익 운동의 대가로 전성기에 정든 팀에서 밀려난 것이다.

그러나 그 희생은 씨앗이 됐다. 이후 선수협회가 자리 잡았고, FA 제도를 비롯한 선수 권리 보장의 초석이 놓였다. 오늘날 선수들이 누리는 계약과 처우의 출발점에 최동원의 이름이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커뮤니티에서 그가 다시 소환되는 맥락도 같다. 고연봉 시대일수록 그 시작을 만든 선배의 헌신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동원은 2011년 세상을 떠났고, 롯데는 그의 등번호 11번을 구단 최초의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부산 사직구장 앞에는 그의 역동적인 투구폼을 담은 동상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