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O 역사상 첫 ‘40홈런 유격수’라는 위업을 세운 강정호. 지금의 야구팬들이 기억하는 그는 강력한 타격력과 안정된 유격수 수비로 상징된다. 하지만 조금만 달랐다면 그는 포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이 변화무쌍한 진로는 초등학교 시절 유격수였던 그가, 고교 시절 갑작스레 팀 사정으로 포수 장비를 착용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고등학교 2학년, 대회에 잠깐 포수로 나설 생각이었던 그는 예상 외로 주전 자리를 지키게 된다. 마땅한 대체 자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KIA 타이거즈에 포수로 입단할 뻔한 흥미로운 일화도 있었다. 그러나 인연은 현대 유니콘스 내야수로 이어졌고, 그의 쭉 뻗는 커리어는 그렇게 시작됐다.
1군 데뷔의 시련과 포수 전향 권유

1라운드 지명에도 불구하고 프로 첫해 강정호에게 기회는 녹록치 않았다. 수비력과 타격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난관 속에, 2군 잔류와 포수 전향 제안까지 받는다. 김시진 당시 감독에게서 수비 범위 한계와 스피드를 이유로 포수 전향을 권유받은 강정호는 다시 한 번 마스크를 썼다.
당혹감 속에서도 경기에 나기 위해 순응했던 그는 여기서도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2007년 타율 1할 초반에 머무르며 1군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는 실패했고, 좌절과 반성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반전의 시작은..

전환점은 2008년, 故 이광환 감독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개막 이틀 전, 감독은 다시 포수 전향을 꺼낸다. 하지만 이번엔 강정호가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내야수로 남고 싶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고, 내야 백업조차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그의 끈기와 노력은 이 감독과 김성갑 코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강정호에게 유격수를 맡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고, 이 말은 곧 ‘차세대 국가대표 유격수’란 말로 이어진다. 그때부터 유격수로서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한 강정호는 2014년, KBO 최초 40홈런 유격수라는 금자탑을 세운다.
포수 경험은 성장의 밑거름

강정호는 “포수가 되는 데 특별한 열정은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경험은 그에게 많은 걸 가져다줬다. 투수 리드, 타자 분석, 포지션 운영 등 야구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야를 선물했다. 이 경험이 그를 더욱 치밀하고 전략적인 선수로 성장시킨 셈이다.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다. “내가 포수를 했으면 강민호는 없었을 수도 있다. 양의지와는 라이벌이 되었을 수도 있다.” 현실 속 강정호는 유격수로 남았고, 팬들은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에 감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