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부정 못하는 KBO 최고의 투수”..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 이야기

KBO 역사상 최고의 투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답은 하나다. 선동열. 이견을 달 사람이 없다. 데뷔 첫해 평균자책점 1.70이 커리어 최악이었고, 0점대 방어율을 세 번이나 찍었으며, 한 경기 232구를 던지고도 마운드를 내려오지 않았다.

몸만 풀어도 상대 타자가 겁을 먹었고, 부상과 일본 2군 강등까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나고야의 태양으로 부활했다. ‘무등산 폭격기’, 그리고 ‘신(神)’이라 불린 투수 선동열의 이야기다.

데뷔 첫해부터 최동원을 넘었다

선동열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만 19세의 나이로 미국, 대만, 일본을 상대하며 우승의 주역이 됐다. 4경기 29이닝 동안 1점만 허용하고 평균자책점 0.31, 탈삼진 30개를 기록하며 대회 MVP에 선정됐는데, 당시 미국 스카우터는 “투구폼은 투박하지만, 저 팔은 단 한 번이라도 가져보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난다”고 평가했다.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선동열은 데뷔 첫해 25경기에서 111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1.70으로 리그 1위에 올랐다. 당시 최고의 투수였던 최동원을 제치고 1위에 오른 것인데, 111이닝 동안 103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구위를 과시했다. 신인왕은 이순철에게 밀렸지만, 이미 신인을 넘어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았다.

0점대 방어율, 한국 프로야구 최초

1986년 첫 풀타임 시즌을 맞은 선동열은 리그를 완전히 지배했다. 튼튼한 하체와 유연성을 이용해 릴리스 포인트를 앞으로 가져가 공이 더 빠르게 느껴지게 했고, 쓰리쿼터 팔각도로 던지는 공은 “던진 것보단 무언가를 발사한 것에 가까웠다”고 묘사될 정도였다. 최대 155km의 직구와 130km의 예리한 슬라이더는 타자들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39경기에서 260이닝 이상을 던지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0점대 평균자책점(0.99)을 기록했고, 19번의 완투승과 8번의 완봉승을 달성했다. 24승으로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그해 허용한 피홈런은 단 2개뿐이었다. 선동열의 활약으로 해태 타이거즈는 1986년부터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해태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232구 던지고도 마운드 안 내려왔다

1987년 5월 16일, 야구팬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명경기가 펼쳐졌다. 최동원과의 선발 맞대결이었다. 선동열은 2회말 2실점을 허용하며 분위기가 최동원 쪽으로 기울었지만, 9회초 2아웃 상황에서 대타 김일환의 적시 2루타로 경기가 원점으로 돌아갔다.

연장 15회까지 두 투수 모두 완투를 펼쳤고, 2-2 무승부로 끝났다. 선동열은 이 경기에서 56명의 타자를 상대하며 7피안타 10탈삼진, 무려 232개의 공을 던졌다. 수술대에 오르거나 선수 생명을 위협당할 정도의 혹사였지만, 스스로 마운드를 내려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후 최동원이 선동열의 손을 잡고 “동열아 우리 끝날 때까지 한번 던져 볼까”라고 물었고, 선동열은 “형님 한번 해 볼까요?”라고 답하며 웃음을 나눴다.

몸만 풀어도 상대가 겁먹었다

선동열은 마운드 위에서뿐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대에게 위협적인 선수였다. 1988년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 손가락 부상에도 불구하고 몸을 푸는 시늉만으로 상대 타자들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삼성의 류중일은 “5회 6회가 되어서 선동열 투수가 몸을 풀면 나도 모르게 겁이 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데뷔 첫해부터 7시즌 연속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하는 대기록을 세웠는데, 데뷔 첫해 1.70이 이 기간 동안 가장 부진한 기록이었다. 1991년에는 연봉 1억원을 돌파하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억대 연봉 선수가 됐다.

부상을 이기고 마무리로 부활

1992년 어깨 건초염이라는 악재가 찾아왔다. 데뷔 초부터 누적된 혹사가 원인이었고, 시즌 아웃됐다. 언론에서는 선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기사까지 나왔지만, 선동열은 모교인 광주일고에서 홀로 훈련하고 무등산을 오르며 부활을 준비했다.

1993년 마무리로 전향한 선동열은 49경기에 출장하여 10승 31세이브, 평균자책점 0.78을 기록했다. 이는 역대 한 시즌 규정이닝 기록 중 최고였으며, 복귀와 동시에 개인 6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1995년에는 0.49의 평균자책점과 33세이브를 기록하며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일본 2군에서 나고야의 태양으로

1996년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한 선동열은 첫해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며 9월에 2군으로 강등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당시 박찬호가 미국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던 시기라 언론에서 둘을 비교하는 기사까지 나오며 굴욕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선동열은 굴복하지 않았다. 하루에 약 3,000개의 공을 던지며 투구폼을 간결하게 만들고, 체인지업과 투심 등을 연마했다. 김응용 감독은 “한국에서 저렇게 훈련했으면 30승은 했을 거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1997년 부활한 선동열은 43경기에서 38세이브, 평균자책점 1.28을 기록했고, 63.1이닝 동안 단 한 개의 피홈런도 허용하지 않는 압도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이후 1998년과 1999년에도 30개에 가까운 세이브를 기록하며 일본 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가 됐다. 33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정상에 오른 뒤, “좋은 이미지로 끝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1999년 은퇴를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