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는 박지성, 야구는 이 선수”.. 국민들에게 진심이었던 레전드 박찬호 이야기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며 온 나라가 한숨 속에 잠겨 있던 그 시절 아침마다 TV를 켜면 지구 반대편에서 한 남자가 공을 던지고 있었다.

박찬호였다. 승리를 따낼 때마다 사람들은 잠시나마 무거운 현실을 잊었고, 그래서 박찬호는 단순한 야구 선수를 넘어 그 시대의 희망이 됐다.

아무도 몰랐던 120만 달러짜리 대학생

1992년만 해도 박찬호는 대학 야구에서 크게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제구력과 변화구가 부족하다는 평가였고, 스포트라이트는 임선동, 차명주, 조성민 같은 동기들에게 집중됐다. 그런데 박찬호에게는 남들이 없는 하나가 있었다. 185cm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150km를 훌쩍 넘는 강속구였다.

전환점은 1993년 미국 국제 대회였다. 98마일(약 158km)의 직구를 꽂아 넣자 MLB 스카우터들이 즉각 움직였고, 이듬해 LA 다저스가 계약금 120만 달러를 들고 부모님까지 직접 찾아가 설득하며 계약을 성사시켰다. 100만 달러가 넘는 계약금은 드래프트 1라운드 최상위 지명자에게나 주어지는 금액이었다.

“신도 세상을 창조하는 데 7일이 걸렸다”

스프링캠프에서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인 박찬호는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다. 드래프트 제도 도입 이후 30년간 단 16명만이 이룬 성과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데뷔 후 연속 부진으로 더블A에 강등됐고, 1994~1995년 2년 동안 메이저리그 등판은 단 4경기에 불과했다.

그 시간을 버티게 해준 건 마이너리그 투수 코치 버트 후튼의 한마디였다. “신도 세상을 창조하는 데 7일이 걸렸다. 우리가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는가.” 박찬호는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스타일을 굳히는 데 그 시간을 쏟았다.

IMF 시절, 새벽마다 TV 앞에 모인 국민들

1996년 팀의 핵심 선발이 부상으로 이탈하며 기회를 잡은 박찬호는 달라진 모습으로 메이저리그 첫 승을 따냈고, 그 해 108이닝 119삼진을 기록하며 구위를 증명했다.

1997년에는 14승 166삼진으로 사실상 팀 에이스 역할을 해냈고, 같은 해 MLB 전 경기가 국내에 중계되면서 박찬호는 대한민국 전체의 이름이 됐다. 외환위기로 나라 전체가 무너지던 그 시절, LA 한인타운에서는 교민 7천~8천 명이 경기장을 찾았고, 아침마다 중계되던 그의 역투는 단순한 스포츠 중계가 아니었다.

커리어 하이, 그리고 7100만 달러의 무게

2000년 박찬호는 18승 ERA 3.27 217삼진(리그 2위)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FA 자격을 얻은 이듬해에는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 최대 7100만 달러에 계약했지만,

다저스 시절부터 안고 있던 허리 부상을 감추고 계약에 임한 게 화근이었다. 텍사스 이적 후 구위는 급격히 떨어졌고, 2년차에는 부상으로 단 7경기 출전에 그치며 먹튀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124승, 그 영광을 팬들에게 돌린 날

비난 속에서도 박찬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샌디에이고, 뉴욕 메츠, 휴스턴, 다저스, 필라델피아를 거치며 저니맨 생활을 이어갔고, 30대 중반에는 무기를 바꾸며 경쟁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2010년 10월 1일, 피츠버그 유니폼을 입은 그는 구원 등판해 3이닝 무실점 6삼진으로 노모 히데오를 넘어서는 아시아인 최다승 124승을 달성했다. “메이저리그에서 124승은 그리 위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 영광을 한국의 팬들에게 돌리고 싶다”고 했다.

이후 한화 이글스에서 마지막을 보내며 연봉 전액과 유소년 야구 발전 기금 6억 원을 기부했고, 2012년 11월 은퇴를 선언했다. 한국 선수도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증명한 사람, 나라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 아침마다 희망을 던져준 사람. 박찬호라는 이름이 여전히 특별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