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 1군 기록이 단 한 줄도 없는데, 야구인들이 지금도 ‘천재’라 부르는 이름이 있다. 김건덕. 1994년 고교야구를 지배했고,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모든 걸 잃었으며, 2016년 11월 마흔의 나이에 급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남자다. 당시 그의 투구를 본 이들은 입을 모은다. 강속구와 싱커를 자유자재로 다뤘고, 슬라이더 하나만큼은 선동열 이후 최고였다고.
1994년, 한 해를 통째로 지배한 열여덟

경남상고(현 부경고) 에이스 김건덕의 1994년은 만화 같았다. 150km 중후반의 강속구로 화랑기 우승 5승 중 4승을 혼자 책임졌고, 투수이면서 타율 0.460으로 이영민 타격상까지 받았다.

정점은 그해 여름 캐나다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이승엽, 김선우와 함께 나선 이 대회에서 혼자 3승을 쓸어 담았고, 미국과의 결승에서는 8회 동점 적시타를 치고 9회 마무리로 올라와 11-10 승리를 지켰다.
13년 만의 세계 제패. MVP와 최다승, 베스트나인이 모두 그의 몫이었다. 롯데가 당시로선 파격인 2억 5천만 원을 들고 왔고, 메이저리그 스카우트까지 그를 지켜봤다.
어깨와 함께 무너진 모든 것

비극은 그 영광의 이면에서 자라고 있었다. 혹사로 어깨는 이미 망가져 있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프로 대신 한양대를 택했다. 연세대는 본인만 원했지만 한양대는 동기 2명을 함께 받아주겠다고 했고, 친구들이 마음에 걸렸던 그는 한양대로 갔다. 입학 후 1년간 등판하지 않고 어깨를 살리기로 했지만, 국가대표에 차출되며 다시 공을 잡았고 그렇게 어깨는 완전히 부서졌다.
이후의 삶은 잔인할 만큼 가팔랐다. 방위산업체 근무 중 손가락 절단 사고를 당했고, 아버지의 투병과 죽음, 생계 곤란이 이어졌다. 훈련소에서 만난 후배 채태인이 그의 양말을 빨아주고 초코파이를 챙겨줬다는 일화는, 한때 한국 야구 최고의 재능이 어디까지 내려갔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남았다.
“아이들은 행복하게 야구했으면”

그런데 김건덕은 야구를 원망하는 대신 야구로 돌아왔다. 야구배트 영업사원으로 인연을 이어가다 춘천고와 부경고 코치를 거쳐, 2013년 부산 사상구 리틀야구단 감독을 맡았다.
자신은 비운의 야구 인생을 살았지만 아이들만큼은 행복하게 야구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고, 제자가 못다 이룬 꿈을 이뤄준다면 그보다 값진 선물이 없을 것이라 말했다. 2014년 결혼해 아들도 얻었다. 인생의 2회말이 막 시작되는 듯했던 2016년 11월 17일, 그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병원에 닿기도 전에 눈을 감았다.
기록 대신 이야기로 남은 선수

김건덕의 삶은 이승엽과의 엇갈린 운명과 함께 국내 최초의 야구 뮤지컬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로 만들어졌다. 프로야구 연감에는 없지만, 무대와 야구인들의 증언 속에 살아있는 선수.
그의 이야기가 지금도 소환되는 건 단지 재능이 아까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혹사가 재능을 어떻게 삼키는지, 그리고 모든 걸 잃은 사람이 야구를 어떻게 다시 사랑할 수 있는지를 그가 몸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